[스크랩] 여수의 올레길 4탄, 소호 바닷길과 안심산 돌기
"야, 저기 유심천 온천이 보인다."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길잡이 잘못한 제가 미안합니다."
유심천 온천까지 내려온 시각이 7시 45분이다. 2시에 모여 15분에 출발하였으니까 무려 5시간 30분 걸었다. 온천에서 내려오는 길목 형제가든에서 생오리를 맛있게 먹고서 심곡마을까지 걸어갔다. 안심산과 무선산 사이 깊은 계곡에 있는 마을이어서 심곡이라고 불러졌다. 아직도 옛 화양면 가는 버스가 들르던 그 길 아래 마을 모습 그대로 남았다. 첫 출발지인 시청앞까지 왔을 때는 10시가 되었다.
시청에서 출발해서 시청에 와서 해산을 했으니까 완벽하게 한 바퀴를 돌았다.
도심 속의 바닷가길 소호동
풀꽃사랑 식구들 10명은 오늘도 새로운 여수의 올레길을 찾기 위해서 시청에서 모여 먼저 선소로 향하였다.
순천부 거북선을 만들던 선소를 바라보면서 걷는 소호 바닷길은 요즈음 여수시에서 야간 경관 사업으로 몸살을 앓는다. 바닷가쪽 아래로 비치는 조명등, 조명등을 연결하는 까만 전깃줄, 길가쪽으로 가로등이 요란하게 서있다. 그것도 모자라 형광등 모양 길쭉한 야간 조명등까지 붙어 있어서 전봇대 행렬을 하고 있다.
기후보호도시로 지정되어서 대체에너지를 쓰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바람개비가 요란하게 돌아가고 있다. 그 전기를 비축하는 축전지가 넘어진 캐비넷 마냥 보도를 가로 막는다.
밤에 잘 보려고 낮 경관을 해쳐서 아름다운 바다를 확 트이게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아름다운 소호 앞바다를 숨도 못 쉬게 답답하게 만드는 야간 조명 전봇대와 시설들 때문에 짜증이 날 수 있다.
"건너편에 유람선도 다니지 않는데 웬 바다를 향한 조명이야?"
고려시대 때 유탁 장군이 싸우지 않고서도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서 불렸던 고려 가요 동동이 전래된 장생포, 장성포 마을 지났다. 가기 전 용기공원, 동동공원과 그 앞 소호해변거리에는 최근 유명 작가 조형물 10작품을 설치하여 명품 거리로 만들었다고 선전하였다.
소호동은 원래 소제마을에서 소와 항호마을의 호를 따와서 지어냈다고 한다. 항호마을에는 당집이 있다. 어촌에서 어부들의 무사귀환을 비는 당집을 세우고 용왕을 달래는 제사를 지냈다. 보기싫게 홍합을 가공처리하는 사업체가 늘비하다.
쌍봉 지역에서 회타운 하면 이곳 소호동이다. 간판을 바꿔 달고, 횟집 거리 표시까지 하였다. 자연산은 없지만 푸짐한 횟감과 덤으로 여수산단 종업원들이 많이 찾는다. 조금만 걸어가면 여수의 명물 소호동 카페촌이 나온다. 연인과 함께 차 한 잔, 맥주 한 잔 하면서 소호 앞바다를 볼 수있는 명물 거리이다. 꼭 부산의 달맞이 고개를 연상하는 여수의 대표적인 관광 명소 중의 하나다.
소호요트장에서는 전국장애인체육대회 준비로 부산하다. 요트 계류장 하나 없는 요트장이어서 들었다 내렸다 하는 시간과 비용을 발생시킨다. 한가롭게 정박해 있는 요트와 바다위에서 바람에게 맡기는 울긋불긋한 윈드셔핑의 돛만 보아도 기분이 좋다. 그러나 그 사이 홍합 양식장이 바다를 뒤덮고 있어서 싫증이 난다.
안심산 아래 소제마을은 소지개 마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의 안심초등학교 이름을 지을 때 고민이 많았다. 안심산자락 아래이므로 안심이 좋은데 꼭 소고기 안심으로 놀림이 있을 것 같아서 그러했지만 거론된 소지개초등학교는 3 글자라 부르기가 힘들다는 것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가는 길에 멋진 방파제는 홍합 양식하는 업자들이 무단으로 가건물을 짓고 가공 처리 시설을 만들어서 냄새가 고약하다. 처리하는 과정에서 생긴 패각과 폐수를 그대로 바다로 버려서 엄청난 예산을 들여서 준설한 바다가 무색하다. 아름다운 소호거리가 홍합 냄새, 양식장 폐부자 등으로 몸살을 앓는다.
여수에 마땅한 숙박시설이 없다고 아쉬워하였는데 최근에 생긴 디오션리조트가 나타났다. 통일교 그룹인 일상에서 세웠다고 해서 여수의 개신교인이 공공연하게 이용 금지를 내려 타격이 많다. 그러나 여수의 아름다운 풍광과 해산물을 찾아 내려온 관광객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평일까지 만실인 리조트가 되었다. 3면이 바다인 여수, 해수욕장이 13개나 있는 여수여서 인공 풀장 같은 워터파크가 필요 없을 것 같았는데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인근의 많은 젊은이와 아이들이 찾고 있다. 개발한 온천수로 이뤄진 사우나는 물도 좋고, 시설도 좋은데 그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평이 있다. 객실에서 내려다보면 꼭 바다 위에 있는 것 같아 가막만 바다와 경치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실제 어부가 운영하는 송소횟집, 전어회로 유명한 대풍마차 등 횟집들이 바닷가로 즐비하다. 옛날에는 솔고개, 송현이었던 이곳과 소제마을이 합쳐져서 송소라고 부르면서 소호 명품거리는 끝이 난다. 88번 종점에서 차 한 잔할 수 있는 언덕 아래 찻집에서 가막만을 쳐다보면 카메라에 손이 안 갈 수 없다.
혈의누 영화 촬영지 가는 바닷가길
이렇게 길좋은 아스팔트 찻길은 끝이나고, 우리는 용주리 바닷가로 접어들었다. 채석장을 지나 용주리로 차 타고 다니면서 보았던 그 들판 아랫길을 걸었다. 따로 길이 없어서 갯가를 가로지르면서 발이 빠지기도 하였다. 멀리 신월동과 소호동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검푸른 바다와 어울린다.
"이럴수가? 혈의 누 영화 속의 마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영화 줄거리 속에 의문의 살인 사건이 일어난 어느 한적한 바닷가 마을이었던 용주리 호두 바닷가이다. 바닷가 선창에 정박해있던 배가 불에 탄 채로 놓여있었는데, 사후 관리가 어려워 그 많던 흙집 들을 없애버렸다. 여수시가 예산을 지원해주면서 사후 황토 펜션으로 이용할 것까지 감안했더라면 좋았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해양 관광 여수를 지향하면서 그 까지 생각 못하는 것이 여수시청 공무원의 정책적인 한계이다. 일행들은 순천의 영화 촬영지를 좋은 사례로 들었다.
이 곳은 벌초 하러 오신 분들이 손으로 파서 반지락을 많이 캘 정도의 황금 양식장이다. 준비해온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면서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의 기분에 빠져있었다. 도심을 벗어나면서 한결 상쾌한 공기를 느낄 수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호두 마을로 산을 넘어왔다. 저쪽으로 화양면 망끝 숲과 백야도, 개도가 한 눈에 들어오는 아름다운 호수 같은 가막만 바다가 펼쳐진다.
어촌과 농촌이 한데 어우러진 용주리 시골길
산 아래 꼬불꼬불한 마을 안으로 들어서는 차가 다닐 수 있는 골목길을 걸으면서 만나는 촌로들의 다정한 말씀 속에 집집마다 예쁜 꽃을 키우는 마음이 묻어나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배초향 꽃을 찍으려고 고개를 갸우뚱해야 하지만 뭘 찍을 것이 있어서 저런가 하는 마을 어르신들이 이상한 눈초리가 느껴진다.
89번 시내버스 종점인 이곳 호두는 여우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이름을 붙였다고 하지만 모두가 바닷가의 표현이다. 선착장에 한 무리의 낚싯꾼들이 북적인다. 뭐가 잡힌가해서 찾아가보았지만 아직 신통한 실적이 보이지 않는다. 감숭어가 많이 잡히는 곳이어서 늘어서 있는 차가 많다.
올해 해파리 때문에 멸치가 안 잡힌다고 하는 보도가 있었는데 이곳에 오니까 실감이 난다. 멸치를 삶아서 너는 곳들이 멸치가 보이지 않는다. 예쁜 집들이 몇 채 들어서고, 젊은이 들이 들어와서 많이 사는 곳인데 아쉽기만 하다. 건너 나진 쪽 포구가 보이는데 그 앞에 왜가리가 엄청 모여살아 나무가 힘겨워 한다는 죽도가 보인다.
고개를 넘어서니까 바로 고돌산진이 있었던 고내마을이 나타난다. 왜구를 지키기 위해서 돌산진이 설치되고, 동헌이 들어서 있던 곳이다. 성을 중심으로 성안을 고내, 성 밖을 고외라고 하였다. 병선이 정박해 있던 자연 굴강은 주차장 만든다고 메워버려서 안타깝다. 뒤늦게 만든 벅수 한 쌍이 마을 초입을 지킨다. 매년 1월 15일 이면 이 벅수 앞에서 당제를 지낸다고 한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였다고 해서 용주리라고 하였다는 용주 마을을 지나 우리는 가을 나락이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고개를 한참 숙이고 있는 용진개, 용문개 들판으로 들어섰다. 용이 나갔다고 해서 용진개, 용이 나간 문이라고 해서 용문개라고 하였다. 용문사 절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 이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는데 수문을 막아서 논이 되었다. 여수에서는 '깨떼기'라고 부르는 화련마을이다. 비봉산 아래 용문사 입구에 추어탕으로 유명한 꽃다리 식당이 있는 곳이 화교, 즉 꽃다리이다. 연꽃이 피어나는 형상이어서 연기 마을이 합쳐져서 그렇게 불렀다.
마을 회관 앞쪽 옛 정취가 물씬 풍기는 돌담 위에 아이비 넝쿨 위에 얹혀있는 새깃유홍초가 눈에 띈다. 비록 해가 지는 시간이라 꽃이 입을 다물었지만 그래도 새롭기만 하다.
역시 잊지 못할 안심산 산길
화련마을에서 안심산쪽으로 들어선다. 시멘트 포장길 따라 한참을 올라가면서 우리가 걷고 싶었던 시골길을 만난다. 아쉽게도 포장이 되었지만 그래도 기분만은 산골 마을을 이어주는 괴나리 봇짐 장수들이 찾던 그런 길이다. 조금만 한 20분만 더 빨리 왔으면 할 정도로 관기 들녁의 석양이 아름답다. 목가적인 풍경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처럼 들판의 연두색이 잘 어울린다.
이번 길에서 평탄한 길만 걸었는데 이제 안심산 자락을 차고 올라야 한다. 어둑해져가는 시간 때문에 발걸음까지 재촉하면서 모두들 땀이 송알송알 맺혀질 정도로 숨이 차다. 시멘트 길이 끊어진 곳에서 가까스레 길을 찾아서 산 중턱까지 오르면서 저 동쪽으로 소제마을이 보인다.
안심산 정상으로 오르지 않고, 상관마을 이정표를 따라서 새로 넓힌 길을 따라서 걷는다. 엣 흙계단을 따라 내려가면서 절을 만났다. 가파른 경사길로 쭈욱 내려가면 바로 관기리이다. 중간에서 욕심이 생겼다. 늦은 시간이어서 시내버스로 가는 것보다 목적지인 심곡마을까지를 산을 타고 가야하겠다는 욕심이다. 그 순간부터 고생길이 훤하였다.
안심할 수 없는 안심산길
안심산 대리석 석재를 실어나르던 그 광산길을 따라 걸었다. 어두컴컴하면서 마을아래 피어오르는 연기와 가로등 불빛이 정겹게 느껴진다. 이곳 저곳에서 반딧불이 우리 갈길을 인도한다. 아뿔싸 어두워지면서 앞길을 분간하기가 어렵다. 흰색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면서 표지판 구실을 하지만 아득하다. 여성회원이신 석양님께서는 아무런 두려움 없이 길을 잘 찾아 헤쳐 다니신다.
"저 불빛이 훤한 저 곳만 넘으면 안심천 온천 같은데!"
그래도 손에 잡힐 듯 하지만 올라서면 넓은 곳이 나타나고 몇차례 반복을 거듭하다가 가까스레 길을 잡았다. 오른쪽으로 선명한 길이 보여서 잘못 길을 들어서게 만든 길라잡이인 내가 미안하였다. 하늘에서는 보기드물게 별들이 쏟아질 듯 하다. 북두칠성과 북극성도 보여서 반갑기는 하지만 길을 제대로 들어서지 못해서 후회가 된다.
안심산 온천이 보이는 순간 안심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안심하고 숨어 살았다는 안심산(347.4m)에서 안심을 하지 못하고, 두리벙거려야 했던 산행이었다.
풀꽃사랑 대표를 맡고 있는 최상모 선생님께서 우리들에게 맛있는 생오리구이를 사주셨다. 맛있는 오리구이까지 먹었으니 목표대로 시청까지 줄기차게 걸어가기로 하여 소호 바닷길과 안심산 돌기는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