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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정약용 남도 유배길/ 호남방 3월 정기도보- 2011년 4월 3일

고락산 2011. 4. 5. 07:35

 

정약용 남도 유배길/ 호남방 3월 정기도보- 2011년 4월 3일 

 

4시 30분 부산 해운대를 출발했다.

덕운은 3시에 경주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덕운의 차에 경주의 덕운을 , 대구의 추계소문, 부산의 나바론과 나 달마루가 함께했다.

순천 역 근처에서 간단한 아침을 먹고, 

영암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에 있는 영암군 보건소에 내렸다. 9시다.

 

 

광주 쪽에서 오는 벗님들을 기다리며 월출산을 바라보았다.

오늘 종일 비가왔다. 비가 오니 전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

 부산에 돌아가니 흐릿한 별이 보였다.

 

 

광주쪽에서 오는 관광버스를 얻어 타고 천황사 삼거리에 왔다.

10시, 여기서 시작한다.

 

 

 
 

 

날다람쥐

사진/ 가다보면 

 

 

 

 

 

 

 

 

 

 

 

 

월출산은 또 이런 모습으로.

 

 

 

 

 

 

 

 

 

 

 

 

 

 

 

 

 

돌고래바위

어떤 무덤 가에 있다.

바위 곳곳에 알터[性穴]이 있다.

 

 

 

너럭바위에도 알터가 있고,

산신제를 지내는 작은 상석도 있다.


 

 

 

 

 

밀양박씨 무덤 앞에 이런 묘한 바위가 있다.

여기에도 알터가 가득 있다.

 

 

 

 

 

 

 

 氣찬랜드

여기서 이른 점심을 먹었다.

 

 

점심 먹고 주변을 돌아보았다.

 

 

 

 

 

 

 

 

 

 

 

 

 

 무화과나무 묘목이란다.

 

 

 

 

 

 

두 개의 절터 주변을 지났다.

 

 

 

도갑사 입구

 

 

입구에 고인돌도 보인다.

 

 

우리는 왕인박사 유적지로 간다.

 

 

군서면 장수발자국- 영암군 군서면 도갑리 죽정 수박동

이곳의 발자국과 관련된 전설이 두 개있다.

첫째, 도선국사가 어렸을 때 뛰어놀던 발자국이다.

둘째, 학성군에 살던 장수 남매가 밥 짓기와 성 쌓기 시합을 하기로 하고 먼저 끝낸 사람이 부르기로 하였다. 동생은 마지막 바위를 하나 남겨놓고 월대암 밑에서 안심하고 한잠을 자고있던 중 누나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동생은 깜짝 놀라 시함에 졌다는 것을 알고 마지막 바위를 아래로 던지고 그 위를 한 발로 뛰어 내렸는데, 바위의 자국들은 그때 뛰어내린 발자국과 흘린 눈물 자국이다. 



 

 

 

 

 

 

 

月鹿亭, 學義亭 등 3개의 비슷비슷한 모양의 정자를 지났다. 

 

 

성기동성천

성천이 있는 이곳은 월출산의 비교적 낮은 언덕으로 둘러싸인 골짜기다. 이곳에 월출산 주지봉에서 흘러내리는 聖川이 있다.

왕인박사가 이 주지봉의 정기를 받아 태어났다고 한다.

왕인박사가 이곳에서 큰 학문을 이루었으므로 뒷날 사람들이 이곳을 '성인의 터자리'라는 뜻으로 成基골이라 하고 우물을 聖泉이라 했다.

성천의 물은 바로 밑에 있는 구유에 받아두고 마셨는데, 음력 삼월 삼짇날 물을 마시고 목욕하면 왕인과 같은 성인을 닣을 수 있다는 전설이 있다. 이런 전설에 따라 삼월 삼짇날 왕인제를 지낸다.

이 성천물이 시내를 이루고 집터를 돌아내려간 시내를 聖川이라 한다.

 


 

 왕인공원에 들어왔다.

우리는 뒷문으로 들어온 것이다.

 

 

■ 王仁博士 유적지 -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 월출산 자락

1970년대부터 몇몇 재야 학자들이 고증한 왕인박사 탄생지에 조성했다. 1976년 왕인박사 顯彰협회가 이곳에 “백제 왕인박사 유허비”를 세운 이후 꾸준한 노력을 거쳐 1987년 유적지 정화사업을 마무리했다.

안에는 위패와 영정을 모신 왕인묘, 각종 자료를 보관한 전시관, 생가의 초석이 남아있는 탄생지, 박사가 마셨다는 우물인 성천 등이 보존되어 있다. 전시관 안에는 <고사기>, <일본서기>에 기록된 박사의 행적을 확인할 수 있게 하였다.

왕인석상은 사당 뒤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30~40분 거리에 있는 朱芝峯에 있다. 왕인 박사는 상대포를 바라보고 있다. 왕인박사가 일본으로 떠난 포구인 상대포는 당시는 번성하는 국제무역항이었지만 지금은 육지로 변해 그 터만 호수로 가꾸어 놓았다.

박사가 동료들과 함께 학문을 닦았다는 장소인 양사재, 학사재, 책굴은 월출산 산정에 있다. 유적지 입구 4km 아래 도갑사 입구로 들어가야 한다.

 

※ 왕인은 백제 제14대 근구수왕(재위 375~384) 때 군서면 동구림리 성기동에서 태어났다. 성기동은 신령스런 바위[靈岩]로 이루어진 월출산 朱芝峯 아래 낮은 구릉으로 둘러싸인 아늑한 골짜기이다.

8세때 주지봉 기슭에 있는 문산재에 입문하여 유학과 경전을 공부하였다. 9세때 부친이 괴질로 돌아가자 가세가 기울어 힘든 상황이었으나 오히려 그것을 계기로 더욱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학문에 정진하였다. 15세때 <論語>, <孝經>, <周易>, <尙書>, <毛詩>에 능통하였고, 17세 때에는 <禮記>, <春秋>, <左氏傳>, <文選> 등을 두루 섭렵하였다. 18세에 오경박사에 등용되었다. 오경박사는 易, 詩, 書, 禮, 春秋 등 經學에 통달한 전문 지식인에게 부여하는 칭호이다.

 

32세 때 당시 일본 應神天王의 초빙으로 <논어> 10권과 <천자문> 1권을 가지고 일본에 갔다. <일본서기-10권 應神天皇(270~310)> 조에 “왕 15년 秋八月 백제왕은 阿直岐를 파견하여 良馬 2필을 보내왔다. 16년 春 2월 왕인이 내조하였다. 이해 아신왕이 죽었다”는 기사가 있다. 당시 왜국에는 백제가 가지고 있는 명마가 없었고, 기마군도 없었다. 왜왕은 아직기에게 명마를 정성스럽게 기르게 하고 또 廐板을 만들어 종마를 길러내게 했다. 아직기는 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아직기의 지식에 반한 왜왕은 백제의 새 인물을 추천해 달라고 했다. 아직기는 왕인을 추천했다. 왜왕은 사자 두 사람을 보내 왕인을 초빙하였다. 왕인은 왜국에 건너가면서 <천자문>과 <논어>를 가지고 갔다. 최초로 유교 경전이 일본에 소개된 것이다. 이때의 <천자문>은 周興嗣가 지은 것이 아니라 기초 한자를 적은 것이었다. 왕인은 아직기를 대신하여 천왕의 태자 우치노와 라이스코(兎道稚郞子)의 스승이 되었으며 그 나라 지배층에 經學을 전파했다. 고대 일본 문화의 기틀을 잡는데 큰 역할을 했고, 일본에서는 ‘아스카 문화의 원조’, ‘고대 일본문학의 시조’라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응신천황 16년은 285년이다. 제17대 阿莘王(392~405)이 죽은 해는 405년이다. 이이화(한국사 이야기 2, 한길사, 1998.)는 이것을 따라 왕인을 아신왕 때 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나 연표에서는 <일본서기>의 기록을 따라 혼란을 보인다.

 

규슈의 신석기문명(소바타토기)은 한국의 빗살무늬토기와 연결된다. 일본의 금속문명이 시작된 야요이시대[彌生 BC 3C~AD 3C]의 유적과 유물은 더욱 확실하게 한국형을 띠고있다. 4C부터 시작된 고분문화도 마찬가지이다. 일본의 고분시대부터 작은 국가들이 여러곳에 성립되었는데, 처음에는 규슈에서 시작되었다가 뒤에는 畿內(지금의 나라 지방)지방으로 이동하여 6C경에는 大和國(야마토)이라는 통일국가를 형성하였고, 7C경에는 나라지방에 飛鳥[이스카]문명이라는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후 8C 말 야마토국가는 지금의 교토(경도)로 도읍을 옮기고 이때부터 헤이안[平安]시대로 부른다.

3C무렵의 야요이시대와 그 후 고분시대에 일본 구성원의 80%가 한족 계통의 사람이 대륙에서 건너온 것이다. 대부분 마한이나 백제 유민일 가능성이 높다. 

 

 

왕인박사 탄생지

이곳이 왕인박사가 태어난 성기동 집터다.

왕인박사는 이곳에서 자라면서 꾸준히 학문을 닦아 유가의 대가가 되었다고 한다.

집터는 북쪽 언덕을 등지고 자리잡았는데, 집터의 기단부분과 주춧돌 · 담장 등 흔적이 남아있다.

집터 오른쪽에는 시내가 흐르고 시내 중간쯤에 우물로 썼던 聖泉이 있으며 물을 받아 썼던 구유바위도 있다.

 

                바위 위에 "古崔氏園 今曺家庄"이란 글이 새져진 것으로 보아 웃날 최와 조씨가 살아던 듯하다.  

 

왕인사당 왕인영정

 

 

 

 

 

오사카 히라카타(梅方)에 있는 王仁塚 부근의 시비에 왕인 作으로 표기된 漢詩다. 이 한시를 영암군 관계자가 적어와 2001년 3월 공개했다. 왕인박사가 한시를 일본에 전파했다고 전해 왔으나 왕인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시가 발견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시비에는 “難波津爾 咲耶此花 冬籠 今乎春部止 開哉此花(난파진이 소야차화 동롱 금호춘부지 개재차화, '난파진(오사카의 옛 지명)에 피어 있던 이 꽃이 눈 속에 싸여 있다가 이제 봄이 오니 활짝 피었구나. 이 꽃이여!') 王仁 作”이라고 적혀 있다.

영암군 관계자는 ‘시비는 수십년 전 일본인들이 왕인총 유적을 정비하면서 설치한 것으로 보인다’고 하며 해석이 어려울 정도로 고어가 많은 것으로 보아 왕인 작품일 가능성이 많다고 했다.

 

 

 거룩한 못 '聖潭'이다.


 

 

 

 

 

 

4시 40분, 왕인공원을 나와 우리의 일정을 끝났다.

관광버스를 얻어타고 영암 시내버스 터미날로 간다.

 

우리는 다시 덕운의 차로 먼 길을 가야한다.

추계소문은 대구로, 나바론과 나 달마루는 부산으로.

 

  

 

 

정약용(영조 38년, 1762~헌종 2년, 1836)

아버지는 당시 세력을 읽고 있었던 남인 양반 丁載遠,

어머니는 해남 윤씨다. 어머니 윤씨는 공재 윤두서의 손녀이고, 윤두서는 윤선도의 증손자이다. 정약용은 넷째 아들로 지금의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두물머리에서 출생한다.

정약용이 태어난 해는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해였다. 이후 조정은 사도세자를 동정하는 시파(남인)와 반대하는 벽파(노론)로 나뉜다.

 

1770년 어머니를 여의고, 10세 때인 1771년에 아버지가 관직에서 물러나자 아버지에게 경서, 사서 등을 공부한다.

15세에 장가를 들어 처가가 있는 서울을 왕래하였다.

이해 정조가 즉위하면서 남인을 등용하자 그의 아버지가 벼슬을 하게되어 더욱 서울에 자주 드나들게 된다.

이 무렵 정약용은 누나의 남편 이승훈, 큰형수의 아우인 이벽과 사귀고 그들을 따라 이가환(성호 이익의 증손자) 등과 교유하였다.

1776년 16세 때에 화순현감으로 부임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라도를 유람했고, 3년 후 아버지가 경상도 예천군수가 되자 영남지방을 유람하였다.

 

1782년 21세 때 서울에 정착하고 본격적으로 과거 공부를 한다. 이듬해 소과에 급제하여 진사가 된다.

1784년 이벽으로부터 처음으로 西敎(천주교)에 대하여 듣고 <天主實義>도 얻어보았다. 이로 인하여 그의 학문은 새로운 세계에 눈뜨게 된다.

처음에는 서교에 상당히 몰두하였으나 과거공부에 바빠지고, 서교가 제사를 부정한다는 설을 들어 전혀 돌아보지 않았다고 한다.

 

1789년 28세 때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들어선다.

33세 때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었고, 34세 때 정삼품 당상관 동부승지에 오른다. 이 기간에 그는 정조의 명령으로 배다리[舟橋]를 만들고, 수원성 설계, 거중기를 만드는 등 기술적 업적을 남긴다.

이 무렵 남인 시파는 다시 信西派와 攻西派로 나뉜다. 1795년 주문모신부 밀입국 사건으로 공서파가 정약용을 천주교도라고 탄핵하자 정조는 그를 홍주목 금정도찰방으로 좌천시켜 비방을 피하게 한다.

1797년 36세 때 다시 좌부승지에 임명되자 다시 비방이 일어났다. 정약용은 정조에게 자기의 천주교 관계 시말을 적은 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그해 정조는 그를 다시 황해도 곡산부사로 보낸다. 2년가량 곡산부사로 재직하는 동안 군포를 줄이고, 호적을 고치고 교육을 일으키는 등 자신의 개혁적 이념을 실천한다.

 

1799년 38세 때 다시 형조참의가 되었고, 규장각 편찬사업에 참여하기도 한다.

1800년 조선 제22대 정조(1776~1800 재위)가 갑자기 세상을 뜨고 12세의 순조(1800~1834 재위)가 즉위하고 골수 벽파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한다. 조정의 주도권은 벽파로 넘어간다. 벽파와 공서파는 시파 신서파에 대한 반격에 나선다.

 

이에 1801년 봄 신유박해가 일어난다. 이 사건으로 셋째 형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은 죽임을 당했고, 다산과 둘째형 약전은 邪學(천주교)에 물든 죄인이라는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어 9달동안 머무르다가, 그해 가을에 황사영(정약용의 조카사위) 백서사건이 일어나자 서울로 불려가 문초를 받고, 11월 강진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되었다.

 정약전은 흑산도로, 그는 18년의 긴 유배생활에 들어가게 된다.

 

강진의 동문밖 주막집에 4년을 지낸다. 그집 당호를 四宜齋라 하였다. 1805년 겨울 報恩山房(高聲寺)에, 1806년 가을 鶴來 李晴이라는 사람의 집에 이사가 있다가 1808년 봄에 다산으로 옮긴다. 이로부터 다산초당은 11년간에 걸쳐 다산학의 산실이 되었다.

1818년 9월 9일 57세 때 유배가 풀려 고향 남양주시 與猶堂으로 돌아온다.

1836년 75세에 세상을 뜬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심서> 등 5백여권의 책을 저술, 조선후기 실학을 집대성했다.

 

■ 신유사옥 1801년의 천주교 박해사건이다.

정조는 즉위 24년(1800) 6월 28일 49세로 갑자기 죽는다. 정조 사후 둘째 아들이 열두살에 순조로 등극하고 대왕대비인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된다. 그녀는 사도세자 사건을 주도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인 金龜柱의 누이동생이다. 정조 시절 잠시 세력을 잃었던 벽파들이 다시 세력을 장악하면서 제25대 철종(1849~1863 재위)조에 이르기까지 60여년간 세도정치가 시작된다.

 

남인 계통의 천주교 신자들을 옹호한 채제공과, 정조가 죽고 어린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그를 대신하여 정권을 장악한 정순대비는 사도세자를 죽인 영조를 두둔하던 벽파(노론계) 세력과 합세하여, 정조의 신임을 받던 시파들을 죽이기 위해 辛酉迫害가 벌어진다. 이 사건으로 천주교 신자 수백명이 사형당하거나 귀양을 갔으며 여러 남인 학자들이 연루되었다. 주문모신부, 정약용의 셋째형 정약종, 이가환, 이승훈 등이 순교했으며, 정약용은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귀양을 간다. 이때 시파(주로 남인) 세력은 정계에서 내몰렸다.

표면상으로는 천주교 박해사건이나 정치적인 헤게모니를 잡기 위한 당쟁이 깔려있다. 이 일로 노론 일파와 尊明排淸을 이념으로 내건 모화주의자들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에에 순조의 할머니 집안인 안동 김씨 세도가 시작되었다. 3년 뒤 왕의 장인인 김조순에게 세도가 돌아가 안동 김씨 세도는 19C 초까지 이어졌다. 순조 27년(1827) 왕이 병약하여 세자가 정치를 대리하게 되자 세자의 장인인 조만영 등 풍양 조씨가 권력을 잡아 안동 김씨와 대립하였다. 이 싸움은 1840년 대 말 헌종(1834~1849 재위)조까지 계속되었는데 대부분 조씨네가 권력을 잡았다.

1850년 철종이 왕에 오른 후 순원왕후의 일가 등 안동 김씨가 다시 세도를 잡았다. 1863년 고종이 왕위에 오르고 대원군이 정권을 잡은 후 폐지되었다.

세도정치는 당쟁과 함께 조선의 힘을 극도로 약화시킨 결정적 요인이었다.

 

 

정약용 남도유배길강진 다산수련원에서 영암 구림마을까지 이어지는 61km 길이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이 길을 '스토리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했다.

 

정약용 남도유배길은 4개의 코스로 나누어져 있다.

1코스 사색과 명상의 다산 오솔길은, 다산수련원~다산초당~백련사~철새도래지~남포마을~목리마을~강진시장~사의재~영랑생가로 이어지는 15km다.

이중 특히 다산초당∼백련사까지 이어지는 2㎞쯤 되는 길은 강진군에서 다산 유배길을 내기 한참 전부터 백련사 가는 길, 또는 백련사 오솔길이라 불리던 아름다운 산책로이다

2코스 시인의 마을길은 영랑생가에서 보은산방~솔치~금당마을~성전5일장~달마지마을로 이어지는 13.4km 길이다.

3코스 그리움 짙은 녹색 향기길은, 달마지마을~무위사~안훈마을~강진다원~월남사지사지 삼층석탑~월남마을신월마을~천황사로 이어지는 16.6km,

4코스 월출산 기충전길은 천황사~기찬묏길~기찬랜드~도선암~왕인박사 유적지~구림마을로 이어지는 16.6km다.

1~3코스는 강진, 4코스는 영암을 지난다.

 

강진에 있는 다산 유배길은 본디 삼남대로의 한 갈래다. 서울 崇禮門에서부터 내려와 천안에서 영남대로와 나누어져 전주, 광주, 목포방향으로 이어지는 길로 나주까지 내려와 강진 · 해남의 이진항을 거쳐  제주도 조천항, 관덕정까지 이르는 1500리 길이다. 

 

1801년 11월, 다산 정약용(1762∼1837)은 둘째 형 정약전(1758∼1816)과 함께 남도 귀양길에 올랐다. 약전은 마흔셋, 다산은 서른아홉 살이었다.

11월 21일 그들은 나주 금성산 아래 밤남정[栗亭店] 삼거리주막에서 묵었다. 밤남정 주막거리는 지금의 나주시 북쪽에 있는 동신대학교 정문에서 삼도면 방향으로 600~700m 떨어진 지점이다. 날이 밝으면 약전은 흑산도로, 동생 약용은 강진으로 가야한다. 

 

茅店曉燈靑欲滅초가 주막 새벽 등불 푸르스름 꺼지려는데

起視明星慘將別일어나 샛별 보니 이별할 일 참담해라.

脈脈嘿嘿兩無言두 눈만 말똥말똥 둘이 다 할 말 잃어 

强欲轉嗅成嗚咽 애써 목청 다듬으나 오열이 터지네.

<栗亭別>

 

형제는 그 다음 날 헤어졌다. 약전은 흑산도 바로 앞에 있는 우이도에 잠시 있다가 흑산도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고,

약용은 혼자 영산강∼영암∼누릿재∼성전 삼거리를 거쳐 강진읍내에 도착했다.

 

다산은 강진에서 16년 9개월을 살았다. 처음 강진 읍성 동문 밖에 있는 주막 東門賣飯家 쪽방에 빌붙어 4년을 살았다.

이어 고성사 보은산방과 강진의 선비 이학래의 집에서 3년 정도 머무르다,

1808년 봄 만덕산 기슭에 있는 외가의 초가 별장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산은 초가의 이름이 다산초당이라 하였다. 

다산은 이곳에서 유배가 끝날 때까지 10년 6개월가량을 살았다. 그 , 그 초가에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 그의 저서 500여 권 대부분이 쓰여졌다

 

헤어진 후 16년째인 순조 14년(1814)에 약전이 흑산도 유배지에서 병들어 돌아갔다. 그는 이 귀양지에서 <玆山漁譜>라는 바다 생물의 생태를 연구한 우리나라 최초의 해양생물학 연구서적을 편찬했다.

그리고 다산은 1818년 9월 유배가 풀려 북한강 두물머리에 있는 집에 돌아가려고 이 길을 다시 걸었다. 

 

① 유배길은 다산초당 초입인 도암면 귤동마을 다산수련원에서 시작한다.

수련원을 지나면 껍질이 하얀 두충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③ 무위사 지나 왼쪽으로 산 밑을 따라 돌아가면 강진다원이다. 다산은 월출산 자락에서 나오는 차가 천하에서 두 번째로 좋은 차라고 했다.

④ 초의선사와 다산이 함께 글을 쓰고 차를 나누었다는 백운동을 지난다.

⑤ 조금 더 가면 나지막한 돌담 사이로 골목길이 나 있고, 이어, 월남사 옛터가 나타난다. 절은 사라지고 3층석탑만 남아있다.

⑥ 월출산 끝자락에 있는 누릿재를 넘어 영암으로 간다. 누릿재는 영암에서 강진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다.

고개를 넘으면 영암땅, 내려서면 월출산 천황사지구다. 

 

이곳에서 다산은 월출산을 바라보며 도봉산을 생각하고 이런 시를 남겼다고 한다. 

 

樓犂嶺上石漸漸 누리령 산봉우리는 바위가 우뚝우뚝

長得行人淚酒店 나그네 뿌린 눈물로 언제나 젖어있네

莫向月南瞻月出 월남리로 고개 돌려 월출산을 보지말게

 峰峰都似道峰尖 봉우리 봉우리마다 어쩌면 그리도 도봉산 같아 

 

<월출산>이란 제목의 이 시는 <耽津村謠>라는 제목의 칠언절구 20수 중의 하나이다.

 

⑦ 천황사지 입구에서부터는 웰빙기(氣)도로이다. 월출산의 기운을 받으며 걸을 수 있다는 명품 도보길이다.

아름드리 소나무 사이로 오솔길이 이어진다. 경치도 좋고, 공기도 맑다. 산의 80%가 맥반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곳에서 성품사지 5층석탑을 지나 기찬랜드에 닿을 때까지 이어진다.

 

⑧ 기찬묏길은 '氣가 가득 찬 산길'이라는 뜻으로 영암군이 지난 6월 탑동약수터에서 용추폭포까지 월출산 자락의 숲길과 농로 등을 연결해 1단계로 5.5㎞를 조성했다. 2013년 5단계로 이루어진 구간이 완공되면 기찬묏길은 모두 40㎞로 늘어난다.

그 중 일부 구간은 다산 정약용의 남도유배길과 겹친다.

⑨ 마을길을 따라가면 도선국사가 출가한 곳이라는 도선암지가 나온이다. 근처에 도갑사가 있다. 옆으로 구림천 흐른다.

 

⑩ 도갑사 입구에서 819번 지방도로를 따라 3km쯤 걸어가면 왕인박사 유적지가 나타난다.

백제시대 바다 건너 일본에 학문과 문화를 전했다던 왕인박사의 자취들이 모여 있다.

공원 이곳저곳에 왕인박사의 탄생지부터 사당, 공부하던 곳, 마시던 샘 등이 복원되어 있다. 

 

 

 

출처 : 인생길 따라 도보여행
글쓴이 : 달마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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